* 하나님의 뜻이 먼저다 (창21:8-13)
이목사10-09 20:07 | HIT :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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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뒤늦게 아들을 본 것이다. 그것도 그의 나이 백세에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다. 25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후사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마침내 백세에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이라 한 것이다. 그 후 아들 이삭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리고 젖을 뗄 때가 되어 아브라함은 잔치를 베푼다.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이삭의 나이는 보통 3-4세 정도로 본다. 오늘날은 이보다는 일찍 젖을 떼죠. 왜 그러냐면 오늘날이야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에만 모유를 먹이고, 우유를 먹이다가 이유식을 먹이면서 조금 일찍 젖을 뗀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유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길게 3-4세 될 때까지 젖을 먹인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에 아기가 태어나서 젖을 떼기까지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아기가 3-4년 동안 건강하게 자란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잔치를 벌인 것이다. 오늘 날도 아기가 태어나고 난 후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하지 않는가! 사실 이것도 과거 어려운 시절에 아기가 태어나 죽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기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 것을 기뻐하는 관습에서 이런 잔치를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으로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렇게 볼 때 당시 이스마엘의 나이는 17-18세 정도 되었다. 이스마엘에 대해 생각해보라.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비록 첩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브라함의 본 부인인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이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마엘이 독차지했던 사랑과 관심이 온통 이삭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그러니 이스마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오늘 9절 말씀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 하는데 이 행동은 이스마엘의 이런 마음이 잘 표현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첫째 아이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가 받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생을 괴롭힌다. 부모가 보고 있을 때는 동생을 예뻐하는 것처럼 하다가도, 부모가 안볼 때는 동생에게 못 된 짓을 저지르곤 한다. 꼬집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끌고 다니기도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이런 일과는 달랐다. 우선 나이 차이가 많죠.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은 한 어머니 밑에서 난 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몸종였던 하갈의 아들이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는 첩의 아들이라 해도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처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첩의 아들은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한 채 집을 떠나야 했다. 후에 생긴 율법에도, 여종이 주인에게서 낳은 아들의 유일한 특권은 종으로 팔리지 않고 자유인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이스마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삭을 더 미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9절 말씀처럼 이삭을 놀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린다’는 말을 단순히 재미 삼아 놀린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서의 본래의 뜻은 ‘멸시’하고 ‘비웃고’ ‘핍박’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은 이삭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권을 상실한 데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어린 동생을 괴롭힌 것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이런 행동을 사라가 보게 된다. 이 모습을 본 사라의 반응을 보라.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내쫓으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10절이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언듯 보면 사라의 이 요구는 지나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스마엘이 이렇게 행동했다고 해서 집에서 내쫓으라니 너무 몰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사라의 편에서 보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앞에서 봤듯이 본처가 아들을 낳으면 첩이 낳은 아들은 아무것도 상속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은 집에서 내 보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만약 그냥 놔뒀다가 기업을 물려받을 때 이스마엘이 방해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사라가 미리 이스마엘과 사라를 내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 사라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이스마엘이 첩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17년 동안을 함께 한 사랑하는 아들 아닌가! 그러기에 사라의 말을 따라 그들을 내어 쫓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일로 깊이 근심하게 되었다. 11절을 보자.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왜 근심하는가? 답은 분명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하나님 께서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12절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당시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라가 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 하나님은 사라의 손을 들어주신다. 사라가 옳으니 사라의 말대로 행하라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걱정도 아시고 마음의 걱정도 덜어주신다. 13절이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우리의 근심 걱정을 다 아시고 그 모든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저는 본문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셨으니 다행이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 과연 사라의 말을 들었을까? 이 물음은 가정이니 답을 정확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라의 말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있어 최대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기 생각’이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자기생각,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자기 주관이 뚜렷 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세다’는 말이다. 어떤 때는 이런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 이런 사람이 큰일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것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자기주장을 꺾지 않고 고집 부리는 경우가 그렇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의 바로 왕이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전달 됐음에도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자기주장을 꺾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결국 온 나라가 박살이 나고 말지 않았는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나 내 주장이 아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확고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먼저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시켜 주시기도 하신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않는가! 저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이런 거라고 본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돕는 관계다. 그러기에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 신앙적으로는 아내가 신앙적으로 앞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기도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안 된다. 왜요? 아내는 하나님께서 남편을 돕도록 세워주신 돕는 배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내도 남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가 이렇게 서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조언해줄 수 있을 때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부부 이야기가 나왔으니 성경에 나오는 부부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성경 특히 사도행전을 보면 ‘귀감이 되는 부부’와 ‘절대로 본받지 말아야 할 부부’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부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다. 이 부부는 본래 로마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강제 추방령을 내려 결국 어쩔 수 없이 로마에서 고린도로 내려와 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 바울을 만난다.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은 이 부부에게는 참으로 복된 일이었다. 그들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는다. 그리고 바울의 진실한 동역자가 된다. 그 후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내놓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해 ‘아볼로’를 탁월한 설교자로 만든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자기의 사업을 정리하고 사도 바울을 따라 훌륭한 부부 사역자가 된다. 멋지죠. 부부가 하나님을 향해 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아름답게 쓰임 받은 것이다.

반면에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되는 부부가 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리바 부부다. 이 부부는 초대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부부다. 이들 또한 하나님께 헌신된 부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그 판돈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음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게 된다. 그러자 이 부부도 자기들도 그런 칭송을 듣고 싶어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바친다. 하지만 전부를 바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판 돈의 일부를 감추고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행동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시죠. 결국 이 부부의 거짓과 탐심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탄로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죠.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바로 서 있어서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죠.  

부부는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한 사람이라도 바로 서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바른 말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해줄 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가? 혹시 내 생각대로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는가?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란다. 말씀을 묵상하기 바란다.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해서 듣기 바란다. 특히 남편은 아내의 소리를 아내는 남편의 소리를 잘 듣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충고라면 따르기 바란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며 사는 성도와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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