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하늘 소망이 힘입니다 / 2007년 4월 8일 주일낮예배
언더우드04-12 21:21 | HIT : 1,119
2007년 4월 8일 주일낮예배

                                                        하늘 소망이 힘입니다
                                                     (고전15:12-19절, 57-58절)

1. 서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숨을 내쉬는 모든 존재들은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피해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워 보일 정도입니다. 옛날 중국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영원토록 살기 위해 동방 삼신산(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에 동남동녀 5백 명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불로초를 구했다거나 그것을 먹고 불로장수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또한 조선왕조 5백년의 역대 임금들을 보면 각종 좋은 보약을 다 먹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죽어 무덤에 차가운 비석 몇 개만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흙에서 난 모든 육체는 벚꽃이 잠시 찬란한 꽃을 피우지만 이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드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프랑스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최고의 지성인이 있었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악성 폐수종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 치료받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자신의 병이 치료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조차 묻지를 못했습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수필을 쓰고 또한 주옥같은 글을 남기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만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신문들은 앞 다투어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왜 사르트르가 이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진정 돌아갈 고향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 살고 나서 나의 영혼은 어찌될까!’ 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이 죽음 앞에서 그렇게나 엄청난 두려움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면서도 인생의 말년을 아주 낡고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보냈습니다. 한번은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아니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지내시다니요.” 그러자 그는 손으로 자신의 신체부위를 번갈아 가리키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집의 지붕과 같은 머리카락도 빠지고 집의 벽과 같은 늑골도 허물어졌어요. 이제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 살고 있답니다.” 방문객들은 더욱 측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지는 않지요. 저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답니다. 그곳은 정말 좋은 곳이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해맑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죽음의 문턱에 선 사르트르와 존 애덤스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사르트르와 존 애덤스는 인간적으로 본다면 둘 다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엄청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은 믿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돌아갈 고향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늘 이렇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려 해도 100% 선하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를 짓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러한 죄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고 결국 우리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예수님이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법입니다. 종종 사건 사고를 통해 어머니가 자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접하게 되는데 바로 사랑은 죽음까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님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우리 또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에 새로운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어 죄로부터 의롭게 된 사람들은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기쁘고 복된 삶을 살게 되지만, 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 지옥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헛것을 쫒아 살아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듯 우리들의 부활 또한 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도 확실한 부활을 놓고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며 사는 사람들이 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기차의 선로가 끊어진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기차처럼 말입니다.  

-부활 신앙이 이렇듯 확고하다면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할 사람들이고 미래의 부활이 보장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면 이제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알아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차피 아직은 이 땅위에 몸을 담고 있으니 이 소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고전15:5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들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2. 첫째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야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산다 할지라도 종종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어떤 때는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떤 때는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들이 우리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곤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현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문제들로 인하여 견고해야 하는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 모든 일들이 다 잘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일이 더 꼬여 가고,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엎친데 겹친 격으로 일어나고,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될 때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비록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3. 둘째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삶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의 삶이 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이고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쾌락에 빠져 허랑 방탕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반드시 부활해 다시 주님 앞에 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부활의 날에 주님 앞에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주의 일에 힘쓰며 살라고 한다고 하여 지금 하고 있는 세상의 일은 다 그만두고 하나님의 일만 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쓰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 각자가 세상 가운데 속해 있는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4. 결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는 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문 위에 글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습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여러분! 기쁨도 순간이요 고통도 순간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순간임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순간적인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을 거뒀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순간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긴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보면 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영원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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