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창18:22-33)
이목사06-10 20:31 | HIT :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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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함께 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직접 전해 주기 위해서다. 사실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는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사라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라에게도 확신을 주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듣는 것이 믿음이 더 가지 않는가! 사라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이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실이 있다.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가? 하나님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며 살기 바란다.

두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심판이 임박했다는 이런 얘기를 아무에게나 할 수 있겠는가? 못한다. 이런 얘기를 아브라함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신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셨다. ‘친구로 여기셨다’ 얼마나 관계가 돈독하고 친밀했으면 이렇게 불렀겠는가!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별로 존재감이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로 여겨질 만한 그런 사람이 되자.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2절을 보자.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났다’한다. 처음에 아브라함의 장막 집에 찾아온 사람이 몇 명이었는가? 세 명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떠난 사람은 몇 명인가? 두 명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창19:1절 앞부분만 보자. “저녁때에 그 두 천사 가 소돔에 이르니...” 소돔에 도착한 사람이 ‘두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체를 분명히 말씀한다. ‘두 명의 천사’라고. 자, 두 명은 떠났고 이제 한 명이 남았는데, 남은 한 명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를 놓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종종 사람들은 이 장면을 두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부르냐면 우리가 기도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라고 이해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맞다. 기도는 대화다. 하나님과의 대화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는가? 대화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면 된다. 막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성도들 중에 기도를 하라하면 어렵게 생각하고 또 어렵게만 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가 대화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대화는 어렵고 복잡한 말로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간혹 특별한 대화일 경우 어려운 말로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일상적인 언어로 편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한다고 할 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과 편안하게 대화 한다는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기도가 될 것이다. 특히 중언부언하는 기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진심을 담아 잘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렇게 호소한다. 23-25절이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 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 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의 호소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약 그곳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곳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그들로 인해 그곳을 용서하겠다고 답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잘 보라.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그의 조카인 롯과 그의 가족의 구원만을 위해 기도했는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놓고 기도했다. 만일 조카 롯만을 위했다면 그렇게 기도할 이유도 없다. 그냥 롯만 그곳에서 빼내오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롯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멸망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위해 간구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한다. 그리고 자기 가족과 자기와 직접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기도한다. 그러나 자기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어떤가? 솔직히 잘 하지 않다. 우리가 보통 어려움 당한 사람을 만나고 나서 헤어질 때 잘 하는 말 있지 않는가! ‘기도하겠다’라는 말이죠.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람 위해 기도하는가? 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겠다’는 말을 했으면 반드시 지키려고 애쓴다.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본 것처럼 자기와 별로 상관없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다. 왜일까? 물론 그의 조카인 롯의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멸망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알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는가! 옆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나도 혹시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봐 모른 체하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그렇게 볼 때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모른 체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심판 하신다고 하시니 그냥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 외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땅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가면서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간구했던 것이다.

이런 걸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데, 아브라함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지도 않았다. 그는 그 이상 을 위해 살았고, 그 이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기도 생활을 한 번 돌아봐야 한다. 다들 기도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의 기도가 너무 근시안적인 기도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우리는 기도할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세계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 망설인다. 하라고 하니까 할 때도 별로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는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이런 거창한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런 거창한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는가? 나 한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이 나라와 민족이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 한사람이 이 제주를 위해 기도한다고 제주도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 그리고 넓게는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기도를 제한 시킬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놀랍지 않은가? 만일 아브라함이 구한대로 그곳에 의인이 열 명만 있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인 이 제주 땅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듣기 원하신다. 우리 자신의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지경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새로워 질 줄로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결코 이 세상이 멸망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구한 의인의 수는 50명이었다. 하나님은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45명 이라도 멸하지 않으시겠는지 물었다. 하나님은 역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40명, 그리고 30명, 그리고 20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경우 역시 좋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대로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봤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묻지는 않았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의인 한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는지? 물었다면 하나님은 뭐라 대답하셨을까? 분명히 이번에도 용서하겠다고 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렘5:1절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 리라” 하나님은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찾는 한 사람 이라도 있으면 용서하겠다’ 말씀하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용서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소돔과 고모라,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이 그 곳에는 10명도 없었다. 이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인구가 대략 많게는 5만에서 적게는 약 2만5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구 중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가?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해 볼 때, 소돔과 고모라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 소돔과 고모라 못지않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심판 아래 놓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내가 의인 10명이 있다면 내가 멸하지 않으리라’ 과연 우리가 사는 이곳에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그런 의인이 얼마나 될까?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의 사명이다. 하지만 그 만큼이나 중요한 사명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모토’가 뭔지 아시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변화된 삶을 살자’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된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회가 없거나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믿는 사람들은 많은 데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적거나 의인이 없는 것이 문제다. 우리 모두가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통해 이 나라와 이 민족의 멸망을 막고 새롭게 회복시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자.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그 한사람이 되자.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이 없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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